280일

저자 : 전혜진 (출판사 : 구픽)

 

이 책의 제목은 임신기간 280일을 의미한다. 이 책은 한국장편소설로 분류가 되어있지만 임신에 대한 몸의 변화와 사회적 문제, 편견, 사회생활에 대한 고립된 여성의 현실을 낱낱이 담은 '보고서'다.

책에 나오는 네 명의 여성이 있다. 은주, 재희, 지원, 선경. 각자 자신의 위치에서 일을 잘하고 있는 안정적인 수입을 가진 30대 중후반의 여성들이다. 사회적 지위에서 나름 실력을 인정받고 스스로 제 몫을 잘해가고 있는 당사자들이지만, [임신]이라는 주제 앞에서 각자 다른 상황에 처해있었다. 임신을 하고 싶어도 난임인 선경, 마음먹고 계획 임신한 재희, 계획에도 없던 임신을 해버린 지원, 늦은 나이에 결혼했기 때문에 자연스러운 임신을 고대할 수 밖에 없던 은주. 제 각각의 이유로 비슷한 시기에 임신해버렸지만 이들이 겪는 몸의 변화와 경력 단절, 임산부의 불평등한 사회적 위치는 공감할 수 밖에 없었다.

나 자신을 존중받지 못하는 현실

임신을 한 순간 모든 일의 우선은 뱃 속의 태아가 차지해버린다. 회사에 뼈를 갈아 일하며 두번이나 유산을 경험한 선경은 결국 자신의 모든 노력을 임신 앞에서 무시당해버렸다. 난임치료를 위해 배에 주사를 스스로 찔러넣으면서, 이 악물고 제 몸 같지 않은 몸을 이끌며 출근했지만 결국 여성이란 이유로, 더욱이 임신했다는 이유로 상사로부터 무시받고 쫓겨나듯 퇴사해버릴 수밖에 없었다. 이런 일을 겪은 여성이 과연 소설 속 주인공인 선경뿐일까?

어쩌다 사고를 당하더라도 혹은 몸이 아프더라도 태아가 우선시되며 임산부의 안위는 배척당한다. 몸에 파스 한 장도 제대로 못 붙이고, 먹고 싶은 음식도 가려야하며, 아프더라도 아무 약이나 주워먹을 수가 없다. 출산에 임박한 순간에도 여성의 고통은 태아 앞에서 묵살당할 수밖에 없다. 재왕절개보다 자연출산이 아이에게 더 좋다는 이유로 가족이 재왕절개를 동의해주지 않아 몸이 망가지고 생명이 위태로운 지경까지 가는 경우도 부지기수라고 한다.

그렇다고 출산 후에는 그 상황이 나아지기라도 할까? 모유수유가 더 좋다며 강요하는 자, 아이를 양육하는데 보탬 없이 훈계질하는 자, 아이 낳았다고 모성애가 뚝딱 생기는지 모성애를 강요하는 자...

나 자신을 존중받지 못하는 경우를 수없이 맞닥뜨리는데 사회는 임신과 출산의 아름다움만을 강요한다.

신체변화

탈모, 피부 트러블, 통통 붓는 팔다리, 숨 쉬기도 버거운 상태, 편한 수면도 취하지 못하는 몸, 시력저하, 기억력 저하, 부실해진 몸, 튼 살, 근손실...

나열할 수 없을만큼 온갖 나쁜 증상이 임신했다는 이유로 몸에 이렇듯 변화가 생긴다. 단순히 팔 다리가 붓고 거동이 불편하다는 사실 정도만 알았지만 현실은 생각보다 더 끔찍한 변화를 가져온다.

이 책의 띠지에서 "이 책을 읽고 비출산을 결심했다" (이 책이 디스토피아 SF가 아니라는 사실을 믿을 수 없었다)라는 민서영 작가의 문장이 있는데 책을 끝까지 다 봐가면서 그녀의 문장에 공감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정말 이해가 안갔다. 임신한다면 내 몸이 이렇게 변한다는 것 정도는 알려줘야하지 않는가? 왜 학교 다니는 성교육에서조차 이런 것 하나 알려주지 않는걸까?

이 책을 보면서 처음엔 팍팍한 현실 속에서 나름 제 일을 잘 해나가고 있는 30대 여성들의 임신에 대한 비관적인 시선들을 담은 건 아닐까 생각하다가 생각을 고쳐먹었다. 이건 비관적인 시선도 아니며 사실 그대로를 담는 것이라고. 사람마다 임신 후 나타나는 신체의 변화도 다를 수 있기 때문에 모두가 이렇게 힘들다라고 할 수는 없다. 하지만 그럼에도 알아야한다는 것은 분명하다. 정작 닥쳐봐야 알수 있다고 하기에는 정신적으로도, 신체적으로도 잃을 수 있는 것이 너무 많기 때문이다.

사회적 대우

한낱 임신은 그 부부간의 일이라고 하기에는 사회에서 저출산 염려와 함께 출산장려를 적극적으로 홍보하고 있다. 차라리 출산장려를 하지 말던가, 임신하라면서 정부는 온갖 정책을 시행하지만 그 정책이 임신 후 잃을 직장을 커버할 정도가 아니라는 건 모두가 안다.

경력이 단절될까 우려하거나 아이를 양육할 형편이 되지 못해서 포기한 여성들의 결정을 정부는 진정 헤아리고 있는 것일까 의문이 든다.

직장이라고해서 임신한 여성들에게 더 나은 대우를 해야한다고 강요하고 싶지는 않다. 그런 강요가 필요하다는 것 자체가 아직 이 사회의 문제점이 많다는 것을 반증하는 셈이니까. 민간 기업에서 일하는 여성들은 공무원들보다 상대적으로 임신과 출산에 대해 더 눈치를 보고 자신이 챙겨야 권리를 제대로 챙기지 못한다고 한다. 법으로 제정되어 있다고 하더라도 사회가 바라보는 시선을 의식하고 눈치를 봐야한다는게 현실이다. 아이 한 명당 고작 몇 십만원으로 출산을 독려하는 정책밖에 못 내며 아직도 폐쇄적인 성교육 시행밖에 못하는 정부에게 거는 기대가 클 수는 없다.

혹여 정말 아이를 낳고 키우고 싶은 사람이라면 돈이 무엇보다 필요하다고 강조하고 싶다. 만약 당신이 난임이라면 정부에서 지원하는 횟수는 매우 적고, 난임치료에 필요한 약물은 매우 비싸며, 몸이 망가지는 것은 물론이고, 임신기간 동안 받는 검진 비용도 무시 못하며, 혹여 임신 중 잘못되어서 응급실에 갈 수도 있고, 출산하는 그 순간마저도 돈이 들 것이라고.

그러니 정말 필요한 정책과 지원을 해주는 해외로 이민가거나, 돈이 정말 많아서 경력이 없더라도 걱정 없는 양육을 할 수 있으면서 스스로의 건강도 챙길 수 있어야 될 것이라고.

처음 이 책을 읽게 된 계기는 임신의 현실이 궁금해서가 아니었다. 단순히 자료조사를 위해서였으며 임신은 커녕 결혼 생각도 없었기 때문에 나에게는 먼 얘기라 생각했는데, 이 책을 다 읽고 난 지금 새로운 결심을 하게 되었다.

"이 책을 읽고 비출산을 결심했다."

(이 책이 디스토피아 SF가 아니라는 사실을 믿을 수 없었다)

-《쌍년의 미학》 민서영 작가

《280일》 추천사

+ Recent posts